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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

무장 독립운동과 의열단, 광복군 활동

by butterbear 2025. 3. 19.

대한제국이 1910년 일본 제국에 의해 강제 병합된 이후, 한민족은 독립을 되찾기 위해 다양한 형태의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그중에서도 무장 독립운동은 일본의 지배에 대한 강력한 저항 방식으로 자리 잡았다. 1920년대에는 김원봉이 조직한 의열단을 중심으로 폭탄 투쟁과 요인 암살이 활발하게 이루어졌으며, 만주와 연해주 지역에서는 독립군이 조직되어 무장 항쟁을 벌였다. 이후 1940년대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한국광복군을 창설하여 연합군과 협력하는 형태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1. 의열단과 폭탄 투쟁

의열단의 결성과 활동

의열단은 1919년 11월 중국 길림성에서 김원봉을 중심으로 결성된 항일 무장 조직으로, 직접적인 무력 투쟁을 통해 일제의 주요 시설을 파괴하고, 고위 관료를 암살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의열단은 단순한 군사 조직이 아니라, 철저한 비밀 결사 형태로 운영되었으며, ‘조선혁명선언’을 통해 그들의 목표와 이념을 분명히 했다.

조선혁명선언

1923년 신채호가 작성한 조선혁명선언은 의열단의 이념과 활동 방향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문서로, 무력 투쟁을 통해 민중 혁명을 이루고 일본의 식민 지배를 종식시킨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는 단순한 독립운동이 아니라 사회 개혁까지 포함한 혁명적 성격을 띠고 있었다.

주요 의열 투쟁

  • 강우규(1919년): 1919년 9월, 노인 동맹단 소속이었던 강우규는 서울 남대문역에서 조선총독 사이토 마코토를 암살하려 폭탄을 던졌다. 비록 사이토는 목숨을 건졌지만, 이는 조선 내에서 무장 투쟁의 가능성을 보여준 사건이었다.
  • 박재혁(1920년): 부산 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하여 일본 경찰 수뇌부를 공격하였다.
  • 김익상(1921년): 조선총독부에 폭탄을 투척하여 건물을 일부 파괴하였다.
  • 김상옥(1923년):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졌으며, 이후 일본 경찰과 치열한 교전을 벌이다 순국하였다.
  • 나석주(1926년): 동양척식주식회사와 식산은행을 공격하여 일본의 경제적 수탈을 저지하려 하였다.

의열단의 변화

1920년대 중반 이후, 의열단은 단순한 개별적 폭탄 투쟁에서 벗어나 보다 체계적인 항일 무장 투쟁을 모색하였다. 이에 따라 1930년대에는 중국 국민당 정부의 지원을 받아 조선혁명간부학교를 설립하고 조직적인 군사 교육을 진행하였다. 이후 의열단원들은 중국 내의 항일 전선에 참여하거나 한국광복군과 합류하는 등 점점 체계적인 독립운동으로 전환해 나갔다.

2. 만주와 연해주의 독립군 활동

일본의 지배가 강화되면서 국내에서의 무장 투쟁은 어려움을 겪었지만, 만주와 연해주 지역에서는 독립군이 조직되어 대규모 전투를 벌였다. 대표적인 전투로 봉오동 전투(1920년)와 청산리 전투(1920년)를 들 수 있다.

봉오동 전투(1920년 6월)

배경: 1919년 3.1운동 이후 독립군의 활동이 활발해지자, 일본군은 독립군을 소탕하기 위해 만주 지역으로 진출하였다. 이에 맞서 대한독립군(홍범도), 군무도독부(최진동), 국민회군(안무) 등이 연합하여 일본군을 상대하게 되었다.

전개: 1920년 6월 7일, 독립군은 봉오동 일대에서 일본군을 유인하여 기습 공격을 감행하였다. 독립군은 지형을 이용한 전술을 구사하여 일본군을 압도하였고, 약 157명의 일본군을 사살하고 큰 승리를 거두었다.

의의: 봉오동 전투는 독립군이 일본군을 상대로 첫 대승을 거둔 전투로, 독립군의 사기가 크게 고양되었으며, 이후 청산리 전투로 이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청산리 전투(1920년 10월)

배경: 봉오동 전투 이후 일본군은 대규모 병력을 동원하여 독립군을 전멸시키려 하였다. 이에 맞서 독립군은 북로군정서군(김좌진), 대한독립군(홍범도), 국민회군 등이 연합하여 청산리 일대에서 방어전을 준비하였다.

전개: 1920년 10월 21일부터 26일까지 청산리 일대에서 독립군과 일본군 간의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백운평, 천수평, 고동하, 완루구 등에서 연이어 전투가 진행되었으며, 독립군은 유격전과 기동전을 활용하여 일본군을 대파하였다. 일본군은 약 1,200명의 사상자를 냈으며, 독립군의 피해는 비교적 적었다.

의의: 청산리 전투는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가장 성공적인 무장 투쟁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전투 이후 일본군은 간도 참변을 일으켜 조선인 마을을 무차별 학살하였으며, 독립군은 러시아로 이동하여 재정비를 시도하게 되었다.

3. 한국광복군과 연합군 합류

1940년,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중국 충칭에서 한국광복군을 창설하였다. 광복군은 임시정부의 정규군으로서 조직화되었으며, 대일 전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준비를 갖추었다.

한국광복군의 활동

  1. 연합군과의 협력: 1941년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한국광복군은 중국 국민당과 영국, 미국 등의 연합군과 협력하여 대일 전쟁에 참여하였다.
  2. 국내 침투 작전: 한국광복군은 OSS(미국 전략사무국)와 협력하여 국내 침투 작전을 계획하였다. 이는 일본이 패망할 경우 한국 내에서 즉시 독립군 활동을 개시하려는 목적이었다.
  3. 대일 선전포고(1941년):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였으며, 한국광복군은 연합군의 일원으로 일본과의 전투에 참여하였다.

특히, 한국광복군은 인도-미얀마 전선에서 영국군과 협력하여 작전에 참여하였으며, 연합군의 특수훈련을 받으며 본격적인 국내 진공을 준비했다. 하지만 1945년 일본이 예상보다 빠르게 항복하면서 한국광복군의 본격적인 국내 진입 계획은 실현되지 못하였다.

4. 무장 독립운동의 의의

무장 독립운동은 한국 독립운동의 핵심 축으로, 독립군의 투쟁과 의열단의 활동은 한민족의 강인한 저항 정신을 보여주는 사례였다. 특히 한국광복군이 연합군과 협력하여 국제적인 독립운동의 일원으로 활동한 것은 대한민국이 독립을 이루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러한 무장 독립운동의 역사는 대한민국 건국의 중요한 토대가 되었으며, 오늘날에도 많은 독립운동가들의 희생과 노력이 기억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