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권 피탈과 한일병합의 과정
조선은 1897년 대한제국을 선포하며 근대 국가로서 자주 독립을 유지하려 했지만, 국제 정세의 변화와 일본의 침략적인 정책으로 인해 점차 국권을 빼앗기게 되었다. 일본은 러일전쟁(1904~1905)의 승리를 계기로 대한제국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였으며, 을사늑약(1905), 정미7조약(1907), 한일병합조약(1910)을 거쳐 마침내 대한제국을 완전히 식민지로 만들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대한제국은 외교적으로 고립되었고, 국내에서는 의병 운동과 항일 저항이 지속되었으며, 국제 사회에서도 일부 반대의 목소리가 존재했다.
1. 대한제국의 외교적 고립과 일본의 압박
1894년 청·일 전쟁(1894~1895)에서 일본이 승리한 후, 일본은 조선에서 청나라의 영향력을 제거하고 적극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했다. 1895년에는 을미사변(명성황후 시해 사건)을 일으켜 친러 성향이었던 명성황후를 암살하고, 고종을 강제적으로 일본의 영향력 아래 두려 하였다.
이러한 일본의 간섭에서 벗어나기 위해 고종은 1896년 아관파천(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을 단행하였고, 이후 대한제국을 선포하며 근대적 개혁을 추진했다. 하지만 일본은 대한제국을 경제적으로 종속시키고, 외교적으로 고립시키며 국권을 빼앗을 준비를 진행했다.
① 대한제국의 근대화 노력과 한계
- 대한제국(1897) 선포: 대한제국은 자주 독립 국가임을 선포하고 광무개혁(근대적 군제·산업·교육 개혁)을 추진했다.
- 경제적 침탈: 일본은 대한제국 내 철도·광산·산업 시설을 장악하며 경제적 종속을 심화시켰다.
- 국제적 외교 고립: 열강은 일본과의 관계를 고려해 대한제국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지 않았다.
- 러일전쟁(1904~1905)과 일본의 군사적 점령: 일본은 1904년 러일전쟁을 일으키며 대한제국을 전략적 거점으로 활용했다.
2. 을사늑약(1905): 대한제국의 외교권 박탈
① 러일전쟁과 가쓰라-태프트 밀약(1905)
- 일본은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후, 미국과 가쓰라-태프트 밀약(1905)을 체결하여 미국이 필리핀을 차지하는 대신, 일본이 대한제국을 지배하는 것을 승인받았다.
- 같은 해, 영국과도 제2차 영일동맹을 체결하여 국제적으로 대한제국 지배를 인정받았다.
② 을사늑약 강제 체결(1905.11.17)
- 일본은 1905년 11월 을사늑약(제2차 한일협약)을 강제로 체결하여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고 통감부(統監府, 일본의 식민 통치 기관)를 설치하였다.
- 당시 고종과 대신들은 조약 체결을 거부했지만, 일본은 강압적으로 조약을 체결하였다.
- 이토 히로부미가 초대 통감으로 부임하면서 대한제국은 사실상 일본의 보호국이 되었다.
③ 대한제국의 저항과 국제 사회의 반응
- 고종은 1907년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를 파견하여 국제 사회에 조약의 부당함을 호소했으나, 열강의 외면으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 민영환 등 대한제국의 관료들은 이에 항거하여 자결하였으며, 항일 의병 운동이 본격적으로 확대되었다.
3. 정미7조약(1907)과 대한제국 군대 해산
① 헤이그 특사 사건과 고종의 강제 퇴위
- 1907년, 고종이 헤이그 특사를 파견했다는 이유로 일본은 고종을 강제 퇴위시키고 순종을 즉위시켰다.
② 정미7조약(1907.7.24): 대한제국의 내정권 박탈
- 일본은 정미7조약(한일신협약)을 강제로 체결하여 대한제국의 내정권을 장악하고, 일본인 관리들을 정부에 배치하였다.
- 이로 인해 대한제국은 사실상 일본의 식민 통치 하에 들어갔다.
③ 대한제국 군대 해산(1907.8)과 의병 항쟁 확대
- 일본은 1907년 대한제국 군대를 강제 해산시켰고, 이에 반발한 군인들과 민중이 항일 의병 운동을 더욱 격렬하게 전개하였다.
- 대표적인 항일 의병으로는 이인영, 홍범도, 신돌석 등이 있으며, 의병들은 전국적으로 일본군과 격렬한 전투를 벌였다.
4. 한일병합조약(1910): 대한제국의 국권 상실
① 일본의 식민지화 작업 가속화
- 일본은 1909년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하얼빈에서 저격하자, 이를 구실로 대한제국에 대한 강압적인 통치를 강화하였다.
- 1910년 6월, 총리대신 이완용과 일본 측이 비밀리에 한일병합을 추진하였다.
② 한일병합조약(1910.8.22) 체결
- 1910년 8월 22일, 대한제국 총리대신 이완용과 일본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조약을 체결하여 대한제국은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
- 1910년 8월 29일, 조선총독부가 설치되면서 대한제국은 완전히 일본에 병합되었다.
5. 의병 운동과 국제 사회의 반응
① 항일 의병 운동
- 국권 피탈에 저항하여 전국적으로 의병 활동이 확대되었다.
- 정미의병(1907~1910): 해산된 대한제국 군인들이 합류하면서 조직적이고 강력한 저항을 전개하였다.
- 13도 연합 의병(1907~1909): 서울을 공격하는 계획을 세우기도 하였으나, 일본군의 탄압으로 실패하였다.
② 국제 사회의 반응
- 대한제국은 헤이그 특사 파견 등을 통해 일본의 침략을 알렸지만, 당시 열강들은 일본과의 이해관계로 인해 대한제국을 지원하지 않았다.
- 중국과 일부 서양 언론에서는 일본의 침략을 비판하였으나, 공식적인 개입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6. 국권 피탈 과정의 의의와 영향
- 대한제국은 일본의 정치적·경제적 압박과 국제적 외교 고립 속에서 점차 주권을 상실하였다.
- 을사늑약(1905) → 정미7조약(1907) → 한일병합조약(1910)의 과정을 통해 점진적으로 식민지화되었다.
- 국권을 상실한 이후에도 독립운동은 지속되었으며, 이후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등의 항일 투쟁으로 이어졌다.
한일병합은 단순한 조약이 아니라, 일본의 군사적·정치적 강압 속에서 이루어진 강제 합병이었다는 점에서 그 부당성이 크며, 한국의 독립운동의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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